오경석(吳慶錫)은 1853년(철종 4)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가 파견될 때 역관으로 베이징에 가서 11개월 동안 머물렀다. 서양열강들의 침략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중국의 상황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신서(新書)를 간행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1853~58년 4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의 개혁문제를 걱정하는 지식인들과 광범위하게 교제·토론하는 한편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의 신서를 구입·연구했다. 1860년 10월 진하 겸 사은사 신석우(申錫愚) 일행을 따라 역관으로 베이징에 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했는데,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사건으로 인한 중국의 대혼란과 위기를 체험했다. 1866년 5월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침공이 준비되자 조선정부가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청국에 파견한 주청사(奏請使) 일행의 역관으로 다시 베이징에 가게 되었다. 이때 서양의 침략에 경험을 가진 중국의 정책가들을 방문하여 프랑스 함대의 동태와 그들의 조선침략 대책수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은 프랑스의 침공에 전혀 관계되어 있지 않으며 프랑스군은 군량(軍糧)이 부족하므로 지형을 이용하여 굳게 지키고 가능한 한 싸움을 피하면서 오래 끌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조선정부에 보고했다. 그의 이러한 보고는 조선이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병인양요 이후 나라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주적인 개국과 개혁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통감했다. 1871년 미국이 수호통상조규의 체결과 개국을 요청해오자, 흥선헌의대원왕에게 미국과의 외교를 주장하고 개항을 건의했지만 쇄국정책을 주장하는 흥선헌의대원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군함이 무력행사를 하며 신미양요를 일으키자 이에는 단호하게 대결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자주성을 잃은 타율적·침략적 개국에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1872년 박규수가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중국에 갈 때 수역(首譯)으로서 수행했는데,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조선의 정치현실과 개국의 문제에 대해 뜻을 같이 할 수 있었고 그후 개화파의 형성에 박규수와 함께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876년 1월 일본이 1875년의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구실로 무력으로 위협하며 개국통상을 요구하자 민씨정권에 의하여 다시 발탁되어 문정관(問情官)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군함을 찾아가 일본측이 강화에 상륙하는 것은 조선정부의 명령 없이는 허락될 수 없으며, 조선의 접견대신(接見大臣)은 군함이 정박해 있는 곳에서 일본측 사신을 접견할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무기력한 조선정부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없었고, 결국 1월 17일 일본군이 군함을 이끌고 상륙하여 강화부의 연무당(鍊武堂)에서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회담 도중 일본의 함포위협을 즉각 중지하도록 항의하는 등 조선측 정사 신헌(申櫶)과 부사 윤자승(尹滋承)을 도와 활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