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원(姜震遠)은 1905년 을사늑약 늑결, 1907년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 군대 강제 해산 등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이 가속화되자 일제의 침탈을 묵과할 수 없다하여 1908년 우국지사인 김명거(金明巨)·김화삼(金化三)·권덕윤(權德允)·김병학(金柄學)·김양화(金良化) 등과 함께 호남의 동부지역인 순천 조계산(曹溪山)을 근거지로 봉기하였다. 의병활동은 지역주민의 호응을 받으며, 1908년 8월 초 곡성 조지촌전투를 시작으로 항일 무장전투를 약 1년여 동안 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남 동부지역인 순천·곡성·여수·고흥·광양·구례와 전북 남원을 무대로 폭넓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화기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순천지역의 조규하(趙奎夏) 의병장과 연합투쟁을 모색하였으며, 나주·곡성의 의병부대를 합류시키는 등 효과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강진원의 항일투쟁은 일제의 침탈기관과 일본 군경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으며 순천 괴목장전투, 과역시장전투, 동복 운월치전투, 쌍암 접치전투와 서정전투, 남원 가정전투, 곡성 압록전투와 동사리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주도하였지만 1909년 6월 순천시 서면 색천사정(索川社亭)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해산되었으며, 강진원은 경남 통영의 연내도(蓮內島)로 피신하였다. 1909년 9월 전라도 지역에서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인해 의병활동은 점차 쇠퇴되었으며 일본군의 의병 탄압이 잠잠해지자 순천으로 돌아와 10여 년간 쌍암면 두모리의 오성산(五聖山) 동굴에서 은신하면서 서당을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지만 일제의 추적에 의해 1921년 7월 16일 체포되었고, 7월 19일 비밀을 지키기 위해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