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자명(柳子明)은 1919년 충주 간이농업학교 학생들을 조직하여 대한광복운동을 계획하였으나 비밀이 탄로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고 한성으로 피신하여 청년외교단에 참가하고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신한청년당 비서로 활동하였다. 민족주의자 신채호, 공산주의 이론가 김한 등과 교류하고 당시 유행하던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점차 한인 아나키스트로 변신하였다. 1922년 류자명은 의열단에 아나키즘적인 급진 투쟁이론을 제공하고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작성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고 의열단원 김지섭, 나석주의 의거를 배후에서 지휘하였다. 이후 중국 내 최초 한인 아나키즘 조직인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비롯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조선혁명자연맹, 남화한인청년연맹 등 각종 한인 아나키즘 조직에서 활동하였다. 동시에 1930년대에 여명중학, 입달학교 등지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중국인 아나키스트 및 지식인들과 친분관계를 형성하였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며 재중국 한인독립운동세력의 통합운동에 매진하였다. 1942년 좌ㆍ우 독립운동세력을 총망라한 통합의회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된 류자명은 임시약헌 개정 기초위원, 학무부 차장 등을 역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