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창(朴始昌)은 1916년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갔고 1919년 9월 말 하얼빈을 거쳐 상하이로 갔으며 1921년 10월 부친 박은식(朴殷植),박경산(朴景山), 박태하(朴泰河) 등과 함께 중국인 임택풍(林澤豊)의 지원으로 사민보四民報를 발행하였다. 1925년 11월 1일 오후 8시 부친 박은식(朴殷植)이 상해의원(上海醫院)에서 서거하였다. 1926년경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 5기 포병과(砲兵科)에 입교하였다. 1927년 7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국민혁명군 경위군(警衛軍)에서 근무하였고, 1932년에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의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쓰촨성 중경(重慶)의 신병훈련처로 전임되었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였는데,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시창은 한국광복군 1지대에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의 끈진길 항일투쟁과 연합군의 승전으로 일제가 패망하자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의 명령으로 일본군 내 한국 사병을 접수하여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중국의 주요 도시에 설치하게 되었고 1945년 8월 한국광복군 상해잠편지대(上海暫編支隊)의 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