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제(金光濟)는 동래경무관(東萊警務官) 재직 중인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관직을 사직하고 친일파 탄핵과 내정의 부정부패 일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전남 고군산도로 유배되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고, 1906년 대구로 옮겨 서상돈과 함께 광문사(廣文社)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서상돈(徐相敦)은 보부상으로 출발하여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정도의 큰 재산을 모았으며 신사고와 근대의식을 가져 독립협회가 창설되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협회의 재무담당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외세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며 국권수호와 민권신장에 힘썼지만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대구로 내려와 김광제와 함께 광문사를 세워 부사장이 되었다. 광문사(廣文社) 사장인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인 서상돈(徐相敦)은 외국의 선진 학문을 소개하고 실학 서적을 번역 편찬하여 근대사상을 전파하고, 자주자강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敦)은 외세의 간섭으로 인한 국망의 위기가 과다한 국가의 빚, 즉 국채(國債)로 인한 것으로 인식하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뜻을 갖게 되었다.1907년 1월 광문사(廣文社) 특별회의를 마친 뒤 서상돈의 발의와 김광제의 적극 찬동으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횃불을 올렸다. 금주·단연(斷煙)으로 의연금(義捐金)을 모아 국채 1,300만원을 상환함으로써 자주독립국가를 이루자는 국채보상운동의 물결은 이후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