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공근(安恭根)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 직후 공범 혐의로 한 달 남짓 심문을 받았고 빌렘 신부, 안정근과 함께 안중근이 있는 뤼순 감옥으로 갔다.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며 의연한 자세로 일관하였다. 안공근은 일제에 대항해 당당하게 싸운 안중근이 유언을 남기는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하였다. 안공근은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말을 배우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강구하였다. 1914년 해외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안중근 기념사진 엽서를 발간하였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초의 러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한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안공근은 독립운동촉성회, 암살 비밀단체인 팔인단,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단체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31년 안공근은 백범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단원의 모집과 관리, 통신연락, 특무활동 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고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설치된 한인특별반을 통솔하였으며 한국국민당 이사,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