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수(文泰洙)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 늑결의 비보를 듣고 구국투쟁에 헌신할 것을 각오하고 항일의 거두인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 구국의 방책을 논의하였다. 1906년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과 산포수를 규합하여 덕유산 영각사(靈覺寺)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무주 원통사(圓通寺)로 부대를 이동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전에 들어갔다. 무주 안성(安城)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1906년 9월 박춘실이 거느린 부대를 규합함으로써 군세를 크게 확장하였고 9월 하순 장수로 들어가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전멸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이후 전국 각지를 오가며 60여 회에 걸쳐 일본군을 토멸하는 영웅적인 항전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말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오르자 호남의병대장으로 호남의병 1백여 명을 이끌고 양주로 향하였다. 1908년 1월 말 허위가 거느리는 3백여 명의 별동대가 흥인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공하였지만, 전력의 열세로 패퇴하자 덕유산으로 귀환하여 다시 항일전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1908년 2월 28일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헌병주재소를 습격, 적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1909년 10월 충북 옥천의 이원역을 습격하여 일본군 3명을 사살하고 역사와 화물열차를 소각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1911년 여름 8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장수 헌병대를 기습하여 10여 명의 일제 군경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등 최후의 항일전을 전개하고 덕유산 원통사로 철수하였지만 추격해 온 일제 군경의 파상적 공격으로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하였다. 1911년 8월 17일 고향을 찾았다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지인에게 속아 체포되었고 옥중에서도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자결 순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