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봉우(桂奉瑀)는 홍명학교의 교사가 되어 한국사와 지리를 가르쳤고, 1910년 영생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의 가르침에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고 구국운동에 힘썼다. 1911년 초 북간도로 가족과 함께 망명하여 간민회(간민교육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광성학교(光成學校)의 교사로서, 후에는 학감으로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면서 신한독립사ㆍ조선역사ㆍ오수불망(吾讐不忘)을 편찬했다. 1913년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ㆍ이동휘가 주도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와 권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권업신문(勸業新聞)에 만고의사 안중근전(萬古義士 安重根傳)을 연재했다. 하마탕 후하(後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다가 1916년 11월 하마탕에서 일제에게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3년 간 고향에서 거주제한을 받게 되었다.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 이후 원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철광단에 가입해 단장에 선출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북간도 국민회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상해에 머무는 동안 임시정부 사료수집위원회의 위원과 구국일보(救國日報)의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탁과 함께 임시정부 간도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간도지방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독립신문에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ㆍ아령실기(俄領實記)ㆍ의병전을 연재하며 한민족의 국외 이주와 민족운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0년 4월 한인사회당에 가입해 기관지 자유종의 주필을 맡았고, 1922년 10월 경 러시아의 이만으로 옮겨 고려인소학교ㆍ8호중학교ㆍ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한인 교육과 한글, 한국사의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