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희(李鍾熙)는 1919년을 전후하여 중국으로 망명 후 대표적인 의열단체로 일제 식민수탈기구의 파괴와 일본 고위관리나 친일파의 처단을 활동목표로 하는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하여 의열투쟁에 동참하였다. 1925년 북경에서 류자명(柳子明)의 지시로 일제의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한 이후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 전환에 따라 1926년 1월 광주(廣州)로 이동하여 10여 명의 의열단원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4기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남창 주둔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남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의열단은 혁명간부 겸 항일투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였고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으로 다수의 청년투사를 양성하여 조직의 위상을 재확립하고 항일운동 역량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의열단은 193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대동단결체 결선운동을 주도하여 1935년 7월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립하였다. 1937년 민족혁명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이끌어 갔고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여하여 총무조장에 임명되었으며 직접적인 항일전을 위해 화북지역으로의 이동을 결의하고 1941년 초 황하를 건너 태항산 일대로 이동하였다. 조선의용대의 잔류 병력과 본부 요원은 1942년 12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1지대(支隊)로 편입되었는데, 1지대 총무조장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34차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민족혁명당 소속의 전라도 출신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3년 김원봉의 후임으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1지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