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혜(朴慈惠)는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 총독부가 총탄을 발포하는 등 평화적인 대한광복운동을 야만적으로 진압하여 각 병원에는 부상자가 끊이지 않았다. 총독부의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민족적 울분을 느낀 박자혜는 함께 근무하던 의사, 간호사들에게 대한광복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며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하였고 간호사들과 동맹파업(同盟罷業)을 준비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나 풀려난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펑티엔(奉天)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여 연경대학(燕京大學)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1920년 4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베이징으로 오자 소개받아 혼인하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1922년 고국으로 돌아와 박자혜 산파라는 산파소를 열고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였다. 한편 중국에 있는 남편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임무를 지원하였다. 1926년에는 한성 지리가 생소한 나석주를 도와 사전에 길을 안내하는 등 나석주의 의거가 성공리에 추진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1928년 4월 신채호가 일경에 붙잡혀 중국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자 남편의 옥바라지까지 도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