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섭(尹琦燮)은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부임하였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와 신민회의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8월 서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는 등 간도를 무장독립운동기지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10여년간 신흥무관학교에서 학감, 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대한광복운동을 주도할 많은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의정원에서 일제와 전쟁을 벌일 것을 직접 주장하였다.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창설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각국의 대표들에게 독립요구서를 발송하는 등 외교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하이에 설립된 한인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우리말과 우리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대한광복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헌신하였다. 1935년부터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서 활동한 선생은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대한광복운동세력이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결집하면서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943년 3월에는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 1944년 6월부터 환국할 때까지 생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