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金度演)은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청년독립단(靑年獨立團)을 조직하였다. 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하고 이를 영문과 일문으로 번역하여 각국 공관에 발송하는 한편, 태극기를 준비하여 동경 시내에서 대한광복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1919년 2월 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동경 유학생 임시총회라는 이름으로 2.8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김도연은 만장일치로 채택된 결의문을 낭독하였고 태극기를 흔들며 동경시내를 행진할 계획이었으나 일경들이 청년독립단(靑年獨立團) 학생들을 붙잡아갔으며 7개월의 실형이 선고되어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22년 미국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북미대한인유학생회의 사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삼일신보(三一申報)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간하는 등 유학생들의 친목 도모와 독립운동 후원에 힘썼다. 워싱턴의 아메리카대학에서 한국의 농촌경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경제학원론과 경제학사를 맡아 강단에 섰으나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에 한계를 느껴 실업계에 투신하게 되었다. 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대표이사에 취임하여 그 수익금으로 조선어학회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다가 1942년 일제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붙잡혀 무려 20개월 동안 미결수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