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천은 1919년 4월 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서 교성대장(敎成隊長)이 되어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전력했다.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교관이 되었고 10월 일본이 훈춘 사건을 빌미로 출병하여 간도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무차별 살육을 자행하자 서로군정서군 400여 명을 인솔하고 백두산 북록(北麓)의 2 군사기지로 대피했고 청산리전투에 참여했던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에 합류해 안도현(安圖縣)의 밀림으로 이동했으며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이 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 달네레첸스크 일대로 이동했고 레닌 정권의 치타 지방정부와 공동작전 및 협조에 관한 협정을 맺고 치타 정부의 원조하에 이르쿠츠크로 이동해 고려혁명군단을 조직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치했는데 이때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준비되자 김동삼(金東三)·배천택(裵天澤) 등과 함께 서간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11월 남간도의 독립단체를 통합한 정의부(正義府)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상비군 8개 중대를 두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창당에 참가해 그 산하 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의 재정비와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1932년 10월 상하이에서 대일전선통일동맹이 조직되었다. 1935년 7월 임시정부 고수파를 제외한 중국 본토지역의 주요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조직했다. 김원봉(金元鳳)·김두봉(金枓奉)·김규식(金奎植)·윤기섭(尹琦燮)·조소앙(趙素昻)·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창당작업에 참여하고 독립군 병사 훈련에 주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조중통일전선(朝中統一戰線)의 중요성이 제기되어 중국정부의 후원하에 1940년 9월 광복군(光復軍)이 조직되자 총사령관이 되어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했으며 1947년 9월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조직했고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