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업원(淨業院)은 조선 6대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살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태묘(太廟)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단종 원년(1453) 간택되어 이듬해에 왕비에 책봉(冊封)되었다. 단종 3년(1455) 6월 숙부인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함에 따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에 봉해졌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들의 단종 복위(復位)운동으로 세조 3년(1457)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나이 18세로 흥인지문 밖에서 눈물로 이별하고 영월 쪽을 바라볼 수 있는 정업원(淨業院)에 작은 초가를 짓고 3명의 시녀를 데리고 거처하였다.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암자 동쪽에 솟아 있는 동망봉(東望峰)에 올라가서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머리를 깎은 송씨는 세 시녀와 함께 초가인 정업원(淨業院)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82세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시가(媤家)인 해주 정씨(海州 鄭氏)의 묘역에 장례하였으며, 봉사(奉祀)도 해주 정씨 가에서 하였다. 숙종 24년(1698)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되면서, 정순왕후도 함께 복위되고 능호(陵號)도 사릉(思陵)으로 추봉(追封)되였다. 영조 47년(1771) 정순왕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비를 세웠는데, ‘淨業院舊基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정업원구기 세신묘구월육일 음체서)’라는 글과 비각(碑閣)의 “前峯後巖於千萬年(전봉후암어천만년)”이란 편액의 글은 영조의 친필이다. 이 비의 받침과 덮개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애석(靄石)이며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으로 무익공계(無翼工系) 단층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정순왕후가 영월 땅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바위에 "東望峰’ 3자를 영조가 친히 새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