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昭顯世子)는 1625년(인조 3) 세자로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주에 내려가 남도(南道)의 민심을 수습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함께 인질로 청나라 선양에 가서 9년간 머무르는 동안 양국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했다. 1644년 9월 명나라를 정벌하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베이징에 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J. 아담 샬에게 천주교와 서양 과학문명을 배워,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가져 왔다. 1645년 2월 18일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조정은 서인들이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소현세자의 태도에 부정적이었고, 인조도 소현세자의 선양에서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또한 세자빈 민회빈(愍懷嬪)과 관계가 좋지 않던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이 여러 가지로 소현세자를 모함했다.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急死)하였고 시신의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어 민회빈(愍懷嬪)과 여러 대신들이 사인을 규명하고자 했다.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서둘러 입관을 마쳤으며 민회빈(愍懷嬪)은 역모를 꾸몄다 하여 가족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