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讓寧大君)은 1402년(태종 2) 원자(元子)로 봉해졌으며, 140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09년 이후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나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직후부터 학문에 게으르고 무절제하다고 하여 태종에게 지적을 받았으며, 나이가 들면서 방종이 더욱 심해져, 태학(怠學)·정강(停講)이 계속되었다. 또한 매와 개 등 완물(玩物)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군소배들과 어울려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 1417년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봄으로써 더 큰 불신을 받게 되었으며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도록 권하고 벌을 주기도 했지만 끝내 이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1418년 5월 류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어 동생인 충녕대군(忠寧大君 : 世宗)에게 왕세자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그후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으며, 세종과 돈독한 우애를 유지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배려로 무사했으며 시와 글씨에 매우 뛰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