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첨(李爾瞻)은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 1593년 광릉참봉을 지내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1599년 이조정랑이 되고 1608년 문과 중시에 장원했다. 선조 말년에 광조와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둘러싸고 후사(後嗣) 문제가 대두되자, 광조의 옹립을 주장하면서 영창대군을 받드는 류영경(柳永慶) 등 소북(小北)을 논박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1608년 갑산으로 유배당했다. 이해 선조가 급사하고 광조가 즉위하자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때부터 정인홍과의 관계를 밀접히 하여 그의 수제자임을 자처하며 그를 통해 조식(曺植)의 학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자부했다. 이와 함께 조식의 추숭사업에도 열성을 기울여 조식을 제향한 사액서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광조 즉위 직후 류희분(柳希奮)을 정점으로 재결속한 소북에 패배하여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3월 사직했다. 1610년(광조 2) 이이첨 당은 군자(君子)의 당이라는 정인홍의 상소에 힘입어 대사간으로 재기용되어 중앙정계로 복귀, 대북과 광조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토역론(討逆論)이라는 명분을 내걸며 반대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강경책을 시행했다. 1612년에 임자옥사를 일으켜 류영경을 처벌하여 소북의 기세를 꺾었다. 1613년에는 계축옥사를 일으켜 김제남(金悌南) 등 영창대군의 지원세력을 축출하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폐했다. 이듬해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죽은 후 광조와 집권세력을 비난하는 여론이 팽배해지자 폐모론(廢母論)을 일으켜 이를 타개하고자 했다. 1618년 정인홍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고 서궁(西宮)으로 유폐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