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李睟光)은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호조와 병조의 좌랑 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냈고, 1590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이반한 민심을 돌이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뒤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했다. 1597년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진위사(陳慰使)로 2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베트남의 사신과 교유했다. 1601년에 홍문관부제학으로 고경주역 古經周易)을 교정했고, 이듬해 주역언해(周易言解)를 교정했으며, 1603년에 사기를 교정했다. 1605년에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 홍주목사로 부임했다. 1609년(광조 1) 중앙으로 와서 도승지·예조참판·대사헌·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청하는 사절의 일원으로 3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유구(琉球)와 타이의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기록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사직했다가, 1616년 순천부사가 되었고 임기를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에서 살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도승지로 관직에 복귀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했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 條陳懋實箚子)를 올려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갔으며,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