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시(開市)는 조선 후기 청나라, 일본을 상대로 열었던 대외 교역 시장으로 압록강 하류에서 열리는 중강 개시와 함경도의 회령 개시 및 경원 개시, 동래의 왜관 개시 등이 열렸으며 개시에서 이루어진 무역 거래를 개시무역(開市貿易)이라 하고 회령 개시, 경원 개시를 북관개시라고 하였다.1407년(태종 7) 경상도 병마절도사 강사덕(姜思德)의 건의에 따라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를 왜인의 출입과 교역품을 통제하였으며, 상경왜인에게는 한양에 동평관(東平館)을 설치하여 숙소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도항왜인이 급증함에 따라 1418년 염포(鹽浦)와 가배량(加背梁) 2곳을 더 늘려 4곳으로 하였다가 1419년 대마도 정벌로 일시 폐쇄하였다.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1423년 부산포와 내이포 2곳을 허락하였고, 1426년 염포를 추가함에 따라 삼포제도(三浦制度)를 확립, 제포 30호, 부산포 20호, 염포 10호의 왜관을 설치하여 항거(恒居)왜인을 거주하게 하면서 도항왜인의 접대와 교역을 허가하였다. 왜관은 왜인들의 행동의 제한, 국방상의 이유로 교역처를 한정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하였다.1544년 다른 곳의 왜관(倭館)은 모두 폐쇄하고 부산포(釜山浦)에만 단일 왜관제도를 설치한 후, 임진왜란 때 일시 폐쇄되었다가 1678년 초량왜관이 신축되었으며, 1872년 메이지 정부에 의해 점령될 당시까지 양국의 외교,무역의 중심지로 존속되었고 왜관에 관리를 파견하여 외교,무역 업무를 총괄하였다. 회령 개시(會寧 開市)는 양국 관리의 감시하에 행하여진 공무역(公貿易)이었다. 청에서는 영고탑(寧古塔)·오라(烏喇) 지방의 상인이 모여들었고, 조선에서도 함경도 지방 상인을 중심으로 한성에서도 모여들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주로 소·보습·솥·소금 등을 수출하였고, 만주에서는 청포(靑布)·모피 등에 그쳤다. 경원 개시(慶源 開市)는 경원에서 청과 행해지던 무역이며 경원에서 정식으로 시장을 개설한 것은 1645년(인조 23년)이었고 격년제(隔年制)로 하여 소·보습·솥과 모피 등을 교환하였다. 국경무역은 수동적이어서 조선의 국부(國富) 증진에 큰 공헌을 하지는 못했으나 사상(私商) 활동의 영역에서 진행되었다. 후시(後市)는 공무역인 개시(開市)에 대칭되는 사상(私商)의 밀무역이며 중국의 회동관(會同館)에서 이루어진 회동관 후시, 압록강 의주(義州)의 중강(中江)에서 이루어진 중강 후시, 압록강 의주 맞은 편의 책문(柵門)에서 이루어진 책문 후시가 대표적이다. 또 함경도 경원(慶源) 등 북관(北關)에서 야인(野人)들을 상대로 행하여진 북관 후시, 부산 등의 왜관(倭館)에서 왜인들과 행하여진 왜관 후시가 있다. 중강 후시(中江 後市)는 1593년(선조 26) 이후 공무역인 중강 개시의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사상(私商)들의 암거래가 활발하여 중강 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50년간 성행하였다. 중강 후시는 일단 폐지되었다가 현종 초에 장소를 옮겨 책문 후시(柵門 後市)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졌다. 정부에서 이를 금하였으나 단속기관인 단련사(團練使)까지 이에 가담하여 단련사 후시라는 이름까지 생기자 1755년 공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