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崔濟愚)는 1859년 경주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했다. 1860년 4월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했다.1861년 포교를 시작하여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정부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으므로 1862년 3월까지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해 있었다. 은적암(隱寂庵)에서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論學文)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제자 중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전도에 힘쓰게 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1862년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접은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으며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 11월 어명을 받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3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고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심문받다가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