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鄭汝立)은 1570년(선조 2)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에 올랐다. 서인으로 이이와 성혼(成渾)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성혼·박순(朴淳)을 비판하여 서인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고 선조의 눈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1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1587년에는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大同契)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1589년 한강이 언 틈을 타서 입경, 대장 신립(申砬) 등을 죽이고 병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의 고변(告變)으로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고 관군에게 쫓기게 되었으며 진안 죽도(竹島)로 피했으나, 포위망이 좁혀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