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純組)는 1800년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장조의 폐위를 주장했던 김귀주(金龜柱)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 기간 동안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했다.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 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1815년과 1827년 많은 천주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했다. 순조는 1804년 12월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가 장악했다.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이교(金履喬)·김조순·김문순(金文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김달순(金達淳) 등이 주요 인물로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세도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과거제도가
장조(莊祖)는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영조가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1743년(영조 19) 당론(黨論)을 없앨 방법을 묻자 여러 당인을 한결로 보아 함께 기용하면 된다고 대답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궁관과 더불어 신임사화를 논하여 의리의 근원을 분명히 가려내기도 했다. 1749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었다. 1752년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장조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영조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장조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부다익과(芬多益寡)의 정사를 베풀고, 영세민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고 노론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貞純王后), 숙의 문씨(淑儀 文氏) 등이 영조에게 장조를 무고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恨中錄)에 따르면 장조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경종(景宗)은 1689년 원자(元子)로 정호된 뒤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이듬해 소론의 지지를 받아 세자에 책봉되었다. 1717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했으나, 숙종이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세자가 병약하고 자식이 없으니 경종의 후사(後嗣)는 연잉군(延礽君 : 영조)으로 정할 것을 부탁했다.1721년 노론의 건의로 연잉군을 세제(世弟)에 책봉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이에 반발한 소론 이광좌(李光佐)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시 친정을 하고, 김일경(金一鏡)의 탄핵을 받아들여 세제 대리청정의 발설자인 노론 4대신을 유배보냈다. 1722년에는 노론 일파가 왕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이 있자,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4대신을 사사(賜死)한 뒤 노론을 모두 숙청했다. 두 해에 걸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소론이 그의 재위기간에 전권을 장악했다. 1722년 흉작이 들자 각도의 연분사목(年分事目)을 개정하여 전세율을 낮추었으며, 삼남지방의 양전(量田)에 대한 민원(民怨)도 시정했다. 1723년에는 서양의 수총기(水銃器:소화기)를 모방하여 이를 제작하게
중종의 첫번째 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소생의 인종(仁宗)은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었다. 1522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유신(儒臣)들과 옛 글을 강론(講論)했다.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으며, 중종이 병이 들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를 계기로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1545년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기준(奇遵) 등을 신원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했다. 1545년 명종(明宗)이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환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했다.1553년 친정(親政)을 하게 된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양(李樑)을 이조판서, 그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전랑으로 기용했다. 명종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킬 수밖에 없었으며 1565년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윤원형과 보우(普雨)를 내쫓고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
예종은 1457년(세조 3) 9월 왕세자 덕종(德宗)이 죽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66년부터 승명대리(承命代理)로 정무를 보아오다 1468년 9월 세조가 죽기 직전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세조말부터 신숙주(申叔舟)·한명회·정인지(鄭麟趾)·구치관(具致寬) 등의 훈신(勳臣)들이 승정원에 상시 근무하면서 정무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고, 예종 즉위 후 전직 대신들이 원상(院相)으로 현직 의정부 대신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무를 처결하는 등 실질적 권력을 장악했다. 원상 세력과 이시애(李施愛) 난 진압에 공을 세운 뒤 정치적 지위가 상승한 강순(康純)·남이(南怡)·구성군(龜城君) 등 적개공신(敵愾功臣) 간의 권력다툼이 노골화되었다. 그해 10월 적개공신 세력이 반역 혐의로 제거되었다.원상(院相)세력은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봉되어 80~150결(結)의 공신전을 받았으며 1469년 3월 3포(三浦)의 사무역(私貿易)을 금했으며, 6월에는 일반 농민이 둔전(屯田)을 경작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해 9월에는 문민질고별감(問民疾苦別監)을 경상도·충청도·전라도에 각각 보내 민란을 진정시켰다.1469년 6월 세계지도인 천하도를 작성했고, 7월 조선 초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은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인 방석(芳碩)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했으나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동에 반대했다. 1455년(단종 3) 모반(謀叛) 혐의로 삭녕(朔寧)에 유배(流配)되었고, 다시 광주(廣州)로 옮겨졌다.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端宗) 복위(復位)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경상도 순흥(順興)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순흥(順興)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계획했으나, 거사 전에 관노(官奴)의 고발로 실패하여 반역죄(反逆罪)로 처형당했다.
단종은 1448년(세종 30)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여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에게 나이 어린 세자의 보필을 부탁했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에게도 좌우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라는 유언을 했으나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군국(軍國)의 모든 권리를 장악하자 1455년 단종은 한명회·권람 등의 강요를 견디지 못하여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김문기·류성원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모두 처형된 뒤,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봉되었으며 10월 승하했다.짧은 재위기간중에도 1453년 양성지(梁誠之)에게 조선도도(朝鮮都圖)·팔도각도(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황극치평도(皇極治平
이병도(李丙燾)는 1922년부터 한국사상사와 지리도참 등 사상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5년 8월부터 1927년까지 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로 일하였으며 이후 조선사편수회에서 퇴사하고, 임시직인 촉탁으로 일하였다. 1933년 4월부터 1943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서 조선유학사 강의를 담당하였다.1934년 5월 7일에는 한국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진단학회를 창립했다. 11월 28일에 진단학보 창간호를 간행하면서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진단학회의 주소를 서울시 종로구 계동 이병도의 집 주소지로 하였다. 진단학보 창간호에 하멜표류기를 번역하여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4월 17일 진단학보 2호를 발간했다. 1941년 4월부터 3년간 이화여자전문학교 사학강좌 담당 강사로 출강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3년 9월 진단학보 14호의 발행을 끝으로 진단학회가 해산되었다. 1945년 8·15 대한 광복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를 지켰다.
어윤적(魚允迪)은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의 교열을 맡아 간행했고, 시무학교(時務學校) 교사를 지냈다.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이 강해지면서 일본어 담당의 번역관·상서관(象書官)으로 관직에 임용되었으며,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 통역을 맡아 일본인들과 교류를 넓히고 훈5등욱일장(勳五等旭日章)을 받았다. 1904년 총영사관이 되었으며, 1906년 용천감리·용천부윤을 역임했다. 1907년 8월 학부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국문연구소의 위원으로서 한글의 문자체계와 맞춤법을 성리학의 태극·음양의 원리로 설명하고 문자학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1908년에는 한성사범학교와 한성고등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10년 8월 경술늑약 불법 늑결 뒤 교육계 대표로 총독부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되었다. 1916년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작업인 조선반도사의 편찬에 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사전 편찬 때 심사위원으로 일했다. 1919년 11월 총독 사이토의 문화통치정책에 따라 만들어진 친일유림단체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의 대표로 취임하여 정만조(鄭萬朝) 등과 함께 유림의 친일분위기 확산에 주력했다. 이후 관계·학계의 각종 친일사업
정만조(鄭萬朝)는 1883년(고조 20)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主事)가 되고, 1889년 알성문과에 급제해 예조 참의·승지·내부 참의·궁내부 참의관 등을 지냈다.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15년 유형(流刑)을 받고 전라도 진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고조 광무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 융희제가 황제로 즉위한 뒤 내린 사면령으로 풀려났다. 규장각 부제학으로 서용되어 헌종·철종 대의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위원이 되었다. 1910년 8월 경술늑약 불법 늑결 뒤 이왕직 전사관(李王職 典祀官)·중추원 촉탁 등을 지냈다. 1920년 친일 유림기관인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를 설립했다. 한국의 역사를 왜곡 날조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1927년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된 뒤에도 위원이 되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강사가 되었으며, 1929년 친일 유림으로 경학원 대제학이 되어 일제 총독통치에 협조했다. 유림들이 경학원에 발을 끊자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총독부의 요구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여 총재를 겸임했다. 대한제국 고조광무제실록·순종융희제실록의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