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景宗)은 1689년 원자(元子)로 정호된 뒤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이듬해 소론의 지지를 받아 세자에 책봉되었다. 1717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했으나, 숙종이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세자가 병약하고 자식이 없으니 경종의 후사(後嗣)는 연잉군(延礽君 : 영조)으로 정할 것을 부탁했다.1721년 노론의 건의로 연잉군을 세제(世弟)에 책봉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이에 반발한 소론 이광좌(李光佐)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시 친정을 하고, 김일경(金一鏡)의 탄핵을 받아들여 세제 대리청정의 발설자인 노론 4대신을 유배보냈다. 1722년에는 노론 일파가 왕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이 있자,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4대신을 사사(賜死)한 뒤 노론을 모두 숙청했다. 두 해에 걸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소론이 그의 재위기간에 전권을 장악했다. 1722년 흉작이 들자 각도의 연분사목(年分事目)을 개정하여 전세율을 낮추었으며, 삼남지방의 양전(量田)에 대한 민원(民怨)도 시정했다. 1723년에는 서양의 수총기(水銃器:소화기)를 모방하여 이를 제작하게 했고, 관상감에 명하여 서양의 문신종(問辰鍾)을 제작하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