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錦城大君)은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인 방석(芳碩)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했으나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동에 반대했다. 1455년(단종 3) 모반(謀叛) 혐의로 삭녕(朔寧)에 유배(流配)되었고, 다시 광주(廣州)로 옮겨졌다.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端宗) 복위(復位)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경상도 순흥(順興)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순흥(順興)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계획했으나, 거사 전에 관노(官奴)의 고발로 실패하여 반역죄(反逆罪)로 처형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