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실존 인물들도 주목받고 있다.
영화는 1980년 5월, 서울의 택시운전사 만섭이 통금시간 전까지 광주에 다녀오면 10만원을 준다는 독일기자 피터를 태우고 광주로 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5·18의 진실을 취재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서울에서 광주까지 그를 태운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극 중 만섭과 피터의 탈출을 도운 황태술 등 광주의 토박이 택시기사들 역시 실재 인물들을 반영했다.
그 시절 광주의 택시기사였던 장훈명(64)씨도 10일 "나도 원래 영화 속 만섭처럼 대학생들 데모가 일에 방해만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고 말을 꺼냈다.
장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택시·버스기사들의 차량시위를 이끌었다.
만삭의 아내를 둔 평범한 20대 가장이었던 장씨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1980년 5월 19일의 기억을 선명하게 풀어냈다.
장씨는 19일 오후 현직 경찰관과 환자로 위장한 경찰관의 대학생 남동생을 택시에 태워 화순으로 도피시켰다.
당시 계엄군의 눈에 띄는 대학생들은 데모에 참가했든 하지 않았든 매질을 당하고 끌려갔기 때문이다.
광주로 돌아와 공용터미널(현 롯데백화점 광주점) 앞을 지나던 장씨는 "군인들이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곤봉으로 피가 낭자하게 패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고 당시 목격담을 전했다.
장씨는 "경찰조차 자기 가족을 보호하지 못한 상황이구나 어안이 벙벙한 채 광주에 왔는데 지옥같은 살육의 현장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시위를 배부르고 물정 모르는 대학생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장씨였지만 그날부터 데모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곧장 광주역으로 가 손님을 기다리던 기사들에게 참상을 전하며 "광주 사람들이 다 맞아 죽게 생겼다. 살려면 대항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이날 동료 기사들과 광주역으로 향하던 계엄군을 막으며 시위했고 공용터미널로 향하던 일부 진입로도 차단했다.
오가는 고속버스 손님들을 상대로 '광주의 참상'을 전하기도 했다.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이라 다친 시민들을 병원에 옮기는 것도 대부분 택시기사들의 몫이었는데, 계엄군에 걸려 두들겨 맞은 기사들이 부지기수였다.
20일 장씨와 동료기사 20여명은 라이트와 경적을 울리며 옛 전남도청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경적을 들은 버스와 택시가 하나둘 합류하면서 금남로 4가에 다다르자 차량 행렬이 200여대에 달했다.
인도와 차도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운전기사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계엄군은 최루탄을 쏘고 방망이로 차 유리를 깨고 기사들을 끌어내 옷을 벗기고 때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유리가 박히고 피범벅이 된 장씨는 시민들에 의해 병원에 옮겨진 뒤 여관에서 숨어지내야 했다.
그는 5·18이 끝난 후에도 폭도, 북한군이라는 신군부의 조작에 맞서 수시로 서울에 올라가 시위에 동참했다.
1986년부터는 '5·18 민주기사동지회' 모임도 만들어졌다.
기사들은 십시일반 회비를 걷어 목욕 봉사를 하고 불우청소년 장학금도 지급했다.
와해 시도에 시달리면서 지금은 회원 수가 20여명으로 줄었지만 회원들은 매년 5월 20일 '5·18 민주기사의 날'마다 무등경기장에서 옛 전남도청까지 5·18 당시 차량시위를 재현하고 있다.
장씨는 불의에 눈감지 않았던 선택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지만 가족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전했다.
무고한 죽음과 폭도라는 누명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돌아다니며 아내와 아들들 곁에 많이 있어 주지 못 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했다는 안타까움이다.
장씨는 "올해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 낭독을 TV로 본 큰아들이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는 문자를 보냈다. 처음으로 떳떳한 아빠가 된 기분이었다"며 "이번에 영화를 보고 며느리도 같은 얘기를 해줘서 고마웠다"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5·18을 폭동이라고,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날조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떳떳한 부모이자 자식, 이웃, 국민이라는 것이 진실"이라며 "5·18에 대한 폄훼가 더는 없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