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金宗瑞)는 국토 확장에 뜻을 두고 있던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1433년 12월 함길도도관찰사, 1435년 함길도병마도절제사가 되어 7, 8년간 북쪽 변방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고 비변책(備邊策)을 올리는 등 6진(六鎭:종성·회령·경원·경흥·온성·부령)을 개척하여 국토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1416~43년에 걸쳐 개척된 압록강 방면의 4군(四郡:여연·자성·무창·우예)과 함께 우리나라의 국토가 두만강·압록강까지 넓어졌다. 1440년 한성으로 돌아와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지내고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를 거쳐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하였다. 1449년 8월에 달달(達達: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란해지자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하였다. 1449년부터 개찬에 착수하여, 1451년에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의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로 고려사(高麗史)가 완성되었다. 같은 해 10월 우의정으로 승진, 편년체(編年體)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여, 1452년(단종 1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세종실록 편찬의 책임관으로 임명되었다. 문종도 죽음을 앞두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등과 함께 우의정인 김종서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으나 1453년(단종 1) 10월 13일 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의 모사(謀士)를 얻고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류수(柳洙) 등 무사들을 규합한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살해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