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렬(朴烈)은 1919년 경성고보 재학 중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저명한 아나키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직접 찾아가 교류하면서 그들의 반제 자유의식과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되었다. 아나키즘을 접한 박렬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의혈단(義血團)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 경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만남을 통해 사상 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반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아나키즘단체인 흑도회·흑우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흑도회 기관지인흑도·민중운동(民衆運動)·후토이센징(太い鮮人)·현사회(現社會)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추진하였다. 그해 가을 일본 태자의 결혼식 소식을 전해들은 박렬은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거사에 사용될 폭탄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3년 9월 도쿄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였고, 이를 기회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일본내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을 자행하였다. 박렬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不逞社) 회원들도 체포되었고,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혀 불굴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표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