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진(權東鎭)은 1906년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에서 만난 손병희(孫秉熙)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교, 도사(道師)가 되었으며 전도에도 종사했다.1918년 11월 일본 오사카 매일신보에 소개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 14개 조항을 읽고 보다 구체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2월에 천도교 측의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과 함께 처음으로 대한광복운동을 발의하여 손병희와 상의하였다. 대한광복운동의 대중화, 대한광복운동의 일원화, 대한광복운동의 비폭력화를 결정한 뒤 이를 거족적으로 펴기 위하여 기독교, 불교 등 각종 종교단체를 망라하는 동시에 저명인사들로 민족대표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1일 태화관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천도교 측 15인 중 한사람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천도교에서 발간하던 잡지 개벽(開闢)의 편집진으로, 또한 신간회의 부회장으로 적극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11.3 대한광복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신간회는 엄중한 경계 속에서 반일시위운동과 대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11.3 대한광복운동의 진상 공개, 구금 학생의 무조건 석방, 경찰의 학원유린 배격, 포악한 경찰정치 타도 등의 강연을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연사로 권동진, 허헌, 홍명희, 조병옥, 이관용 등을 내정했으나 사전에 탄로나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