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천(張錫天)은 광주청년회에서 활동하며 광주시내의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의 조직과 지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1926년 11월 초 광주고등보통학교ㆍ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주축으로 신사상의 보급과 연구, 식민지 교육체제 반대 등을 목표로 하는 성진회가 결성되었다.성진회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 학교에 연구모임이 지속되었고, 1928년 6월 독서회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었다.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장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며 독서회 결성을 후원하고 항일의식 고취와 항일운동 방안을 협의했다.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서 전남지역 단일 청년연맹 조직을 위해 노력했다. 며칠 전 나주역에서 발생한 한ㆍ일 학생 간의 충돌로 광주지역 한일학생 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었고 1929년 11월 3일 11.3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났다. 11월 3일 광주고보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귀가 중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이 발생했다. 일제는 한인 주동학생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착수했으며 이는 광주지역 사회단체 인사들을 자극하였다. 광주지역 사회단체 지도자들과 대책을 협의하고 대한광복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결의했다. 광주고보생들에게 전단을 작성하고 각 학교 독서회 관련 학생들에게 대한광복운동에 적극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1929년 11월 12일 독서회원들을 중심으로 2차 11.3 대한광복운동이 촉발되었다.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허헌과 11.3 대한광복운동의 전국 확산을 협의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직접 한성으로 와서 휘문고보ㆍ보성고보 등의 학생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한성에서의 대한광복운동을 추진했다. 격문 살포 등 대한광복운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12월 5일 관련자 10여 명과 함께 일제에 붙잡혔다. 1931년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장석천은 전남청년연맹이나 광주고보 동지들과 연락하면서 사회운동을 재개하고 노동조합 결성 및 비밀결사와의 연대를 위해 노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