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근(安明根)은 러일전쟁 직후 대한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때에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을사늑약으로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인 교육운동단체였던 안악면학회와 해서교육총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했다. 일제 통감부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켰다. 사촌형 안중근(安重根)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쳤고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를 결행하였다. 1910년 8월 경술늑약 이후 서간도에 한인청년들을 이주시켜 학교를 세우고 교육 후 중국의 무관학교에 보내 독립군 양성, 매국노 이완용ㆍ송병준 처단과 같은 의열투쟁,일본군에 대한 직접적인 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을 구상했다. 신민회에서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각도의 대표를 선정하고 각도별 모금액을 결정했다. 독립운동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먼저 무기를 구입하고 동지를 규합했다. 박만준ㆍ이승길 등의 동지와 함께 안악ㆍ신천 등의 부호를 찾아 1만원 정도의 자금을 거두었다. 황해도 일대에서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한 준비 단계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10년 11월 황해도 신천의 민병찬과 민영설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민병찬이 일제 헌병에게 밀고하여 1910년 12월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일경에게 붙잡혔다. 일제는 1911년 1월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참여한 동지들을 모두 붙잡아 가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일제는 황해도의 신민회 관계자 160여 명을 붙잡아 수감하는 안악사건을 조작하였고 신민회의 주요 간부들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기도했다고 날조했다.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