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재룡(禹在龍)은 국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으로 대항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1902년 대구부 진위대에 입대하여 강제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는 1907년까지 근무하였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지휘하는 청송의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청송의 보현산(普賢山)과 영일군 동대산(東大山) 일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최세윤(崔世允) 대장 등 산남의진의 핵심인물들과 함께 체포되어 내란죄라는 혐의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 1911년 옥고에서 풀려나 박상진(朴尙鎭)과 함께 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했다. 대한광복회 본부의 지휘장이자 국외 연락책임자로서 간도로 파견되어 길림에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혁명기지의 건설에 힘썼으며, 군자금 모집에도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여 경주에서 세금을 운송하는 우편마차를 공격해 8천7백원을 탈취하기도 했다. 국내자산가로부터 의연금을 모집하기 위해 1917년 포고문을 발송하고 친일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이후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1920년 6월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고 김좌진이 활동하고 있던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벌였으나 체포되어 1937년 석방될 때까지 16년간의 긴 옥고를 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