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李承熙)는 서양 종교의 배척과 내정개혁을 요구하는 시사소(時事疏)를 올렸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그해 12월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4월 석방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성주의 국채보상단연회(國債報償斷煙會) 회장이 되어 활동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서한을 보내 일제의 침략 만행을 규탄했다. 같은 해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고조 광무제가 퇴위하자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세계 여론에 강제 퇴위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일제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이 더욱 노골화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류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승희는 1909년에는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의 국경지대에 있는 길림성(吉林省) 봉밀산(蜂密山)에 황무지를 구입, 100여 가구를 정착시켜 한인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고,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14년에 요동(遼東)으로 가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설하고, 공자묘(孔子廟) 등 중국 각지의 유교성적지(儒敎聖跡地)를 순례하는 한편, 위안스카이·쑨원·캉유웨이 등 중국의 명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공자의 교로써 국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