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숙(金昌淑)은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성토 건의서를 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07년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설립되자 대한협회 성주군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하였다. 1909년에는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 설립에 참여하였다.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주장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규탄하는 글을 중추원에 발송하였다.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이 늑결되자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이후 술에 취해 방랑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압송되었다. 부산을 떠나 대구로 압송된 뒤,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 대표들이 연명으로 서명,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제출하였으나 좌절되었고 수백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었다.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임시정부 교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국독립후원회, 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의 조직, 결성에 기여하였다. 망명한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후원하였고 1920년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 창간, 신채호와 협력해 독립운동기관지 천고(天鼓)를 발간했다.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서로군정서의 군사선전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1926년 이동녕, 김구 등과 협의해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