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백린(盧伯麟)은 1900년 한국무관학교 교관, 육군연성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을사늑약 늑결과 군대 해산, 경술늑약 늑결에 반대했다. 1907년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1915년 미국으로 망명했고 미국 하와이 주에 머물면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 박용만과 함께 한인 독립군 부대를 조직했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여 1920년 캘리포니아 주 북부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공군 독립군을 양성했다.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에서 군무부총장을 맡았고,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군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며 신채호, 박용만 등과 함께 무력을 통한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쪽에 속했다. 1919년 임시정부 군무부총장으로 임명되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선발되었으며, 2대 군무총장으로 재선임된 후, 미국에 머물면서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교포인 김종린(金鍾麟)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으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는데, 1920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 맞춰 JN-4D 2대를 이용선·이초 두 사람이 조종한 것이 한국인이 처음 비행기를 조종한 것이 되었다.1922년 6월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서리에,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며, 1924년 12월 16일 박은식 내각의 임시정부 군무총장 겸 교통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에 2대 박은식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교통총장 겸 군무총장직을 겸직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