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웅렬(尹雄烈)은 1878년 통리기문아문 참사를 지내고,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1년 5군영(五軍營)에서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조선 최초의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만들고, 좌부영관(左副領官)으로서 별기군을 주도했다.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민들이 친일 인물들의 집을 파괴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자 한성을 탈출하여 원산을 거쳐 부산으로 가서, 박제경(朴齊絅)의 주선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망명했다. 임오군란이 실패한 후 귀국하여, 개화당 인물들과 가깝게 지냈으나 조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행동에 반대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내각의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진행되는 동안 아들 윤치호에게 외세에 의지한 것이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으며, 소수의 일본군으로 다수의 청나라 군대에 대항할 수가 없다는 등 6가지 이유를 들어 실패를 예견했다. 청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이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물들을 귀국시키고 흥선헌의대원왕을 끌어들여 친일 정권을 수립하자 풀려났다. 1895년 3차 김홍집 내각의 경무사(警務使)로 임명되었으며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10월 12일 미국 공사를 비롯한 주한 구미외교관들의 협력을 얻어 고조 광무제를 궁성 밖으로 모셔나와 친일정권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려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조종했으나 실패했다. 1896년 참장군부협판(參將軍部協辦)에 임명되었으며,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법부 협판·의정부 찬정을 겸임했다. 이어 법부대신 겸임 고등재판소재판장이 되고, 군부대신을 지냈다. 1899년 귀족원경(貴族院卿)이 되었다. 1902년 특진관으로서 평리원재판장사무(平理院裁判長事務)를 지내고, 이듬해 다시 군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내장원경사무(內藏院卿事務)를 겸했다. 1903년 군부대신으로서 원수부 검사국총장사무(元帥府 檢査局總長事務)를 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