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李麟榮)은 1895년 미우라 일본 공사에 의한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여주를 기반으로 거병하였으나 의병의 무력으로는 일본군을 당하기 힘들었고,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이인영은 의병대를 해체하고 문경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10년 후인 1905년 을사늑약 늑결 이후 또다시 전국적으로 을사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대를 조직한 이은찬의 권유로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을 맡으며 다시 격문을 뿌리고 거병하게 되었다. 의병을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의병 조직은 한성부로 진공할 계획을 세우고 연합군인 13도 창의군을 구성했다. 허위와 함께 연합군 결성을 주도한 이인영은 13도창의군의 총대장에 올랐다. 그의 휘하로 모여든 의병의 숫자는 약 8천여 명이었으며 허위, 민긍호, 이강년 등 유명한 의병장들이 함께 했다.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은 결사대원을 선발하고 격문을 외국 영사관에 전달한 뒤 양주에서부터 한성 진공을 개시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