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鄭仁弘)은 1573년(선조 6) 김우옹의 천거로 황간현감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고 1581년 장령이 되었으나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를 축으로 한 서인계에 밀려 1584년에 낙향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최영경·이발(李潑) 등 조식학파가 탄압을 받으면서 이황학파와 결별하고 북인을 형성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문 수학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 등과 함께 성주·고령·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퇴, 경상우도를 방어했으며, 이를 계기로 조식학파는 경상우도에서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고 중앙정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1602년 대사헌을 제수받았으나 기축옥사를 일으켰던 서인과 이를 방관했던 남인을 배제하고자 이들과 치열히 다투다가 수개월 후 낙향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산림으로서 영향력만 행사했다. 1608년 영창대군과 광조를 둘러싼 후사문제로 북인이 대북·소북으로 대립하게 되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의 영수 류영경(柳永慶)을 탄핵했다가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듬해 영변에 유배되었다. 광조가 즉위하면서 유배가 풀린 후 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 대북의 정권 주도를 지원하고 대북의 고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후 조식과 조식학파의 학문적 위상 강화작업을 활발히 추진하여 조식의 문묘종사를 추진하는 한편,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학문을 비판하고 이들의 문묘종사를 저지했다. 이 일로 8도의 유생들에게 탄핵을 받고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되는 등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 지원세력을 제거하라고 주장했으나 영창대군의 축출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논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