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은 1868년 종친정시문과(宗親庭試文科)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4월 11일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를 거쳐 헌납(獻納)을 지내고, 1871년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872년 부사과(副司果)를 지내고, 다시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873년 교리(校理)가 되었으며, 1876년 종친부정(宗親府正)이 되었다.1877년 집의(執義)를 거쳐 1878년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고, 부호군을 거쳐 1880년 4월 30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었다.1882년 종정경(宗正卿)을 거쳐 1888년 6월 30일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이해 11월 22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고, 이해 12월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할 때 감인 당상(監印堂上)을 지냈다.1890년 종정경(宗正卿)되고, 1892년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6월 23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이해 8월 15일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이해 10월 30일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1893년 10월 12일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1895년 4월 27일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5월 25일 시종원경 겸 시종장(侍從院卿兼侍從長)에 제수되고, 이해 7월 28일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1895년 10월 12일 시종원경(侍從院卿)으로 있으면서 국왕을 궁성 밖으로 모셔 나와 친일정권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고자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다.시종 임최수(林最洙), 탁지부사계국장(度支部司計局長) 김재풍, 참령 이도철(李道徹), 정위 이민굉(李敏宏), 전의원(前議員) 이충구(李忠求), 중추원의관 안경수(安?壽) 등과 모의하여 이범진(李範晉)·이윤용(李允用)·이완용(李完用)·윤웅렬(尹雄烈)·윤치호(尹致昊) 등의 호응을 받아, 친위 1대대 소속 중대장 남만리(南萬里)와 친위 2대대 소속 중대장 이규홍(李奎泓)이 인솔한 800명의 군인들로 하여금 건춘문(建春門)으로 입궐을 시도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춘생문에서 담을 넘어 입궐하기로 약속하였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李軫鎬)가 어윤중(魚允中)에게 밀고함으로써 어윤중의 선무공작(宣撫工作)으로 거사에 실패하였다. 1896년 2월 11일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 제수하였다. 3월 1일 혼전(魂殿)의 향관(享官)에 임명되고, 10월 19일 경소전(景昭殿)을 새로 지은 공로로 종1품으로 가자하였다.1897년 3월 12일 홍문관 시강(弘文館侍講)을 겸임(兼任)하고 7월 12일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를 겸임시키고,10월 1일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898년 4월 30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고, 7월 11일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 임용되어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되고, 10월 11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었다. 11월 9일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를 거쳐 11월 30일 종정원 경(宗正院卿)에 임용되어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되고 12월 21일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 제수되었다.1899년 2월 22일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를 겸임하고, 5월 14일 부장(副將)이 되고, 7월 13일 겸임 표훈원의정관(兼任表勳院議政官)을 거쳐 7월 20일 임시서리군부대신사무(臨時署理軍部大臣事務)에 임용되고 9월 21일 청안군(淸安君)으로 봉작하였다.1900년 1월 9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고, 4월 22일 훈(勳) 1등에 서훈(敍勳)하고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였다. 6월 25일 행로명정서사관(行路銘旌書寫官)이 되었다.1901년 2월 6일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고 4월 23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되고, 5월 5일 호위대 총관(扈衛隊總管)의 사무를 서리(署理)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