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최초의 서양식 화폐인 대동은전(大東銀錢)이 등장하였고 1883년 근대 화폐를 발행할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했으며 1884년 묄렌도르프는 독일에서 압인기(壓印機) 3대를 수입하여 "을유년"(乙酉年)이 표시된 1냥 은화와 5문 동화(五文銅貨)를 시주(始鑄)했고, 1885년 선혜청(宣惠廳) 별창(別倉) 자리에 신축한 경성전환국은 1886년 "개국 495년"(開國四百九十五年)이 표시된 금화·은화·동화 등 15종의 압인주화(壓印鑄貨)를 시주했다. 1891년 은본위제를 표방하는 신식화폐조례(新式貨幣條例 )가 반포되었고 1892년 인천전환국이 설립되어 5냥 은화, 1냥 은화, 백동화, 적동화, 황동화 등을 소량 시주(始鑄)했다. 신구화폐의 교환 업무를 관장할 태환서(兌換署)를 한성에 설치했는데 문란한 화폐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구권화폐를 태환권(兌換券)과 교환하여 구권화폐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난 후 태환권으로 신권화폐를 교환해 주기 위한 수단으로 발행하기 위해 태환서(兌換署)를 설치했다. 태환서(兌換署)는 태환(兌換) 업무를 위해 1893년 50냥, 20냥, 10냥, 5냥 4종류의 지폐(紙幣) 태환권(兌換券)을 준비했으나 미 발행에 그친 상징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紙幣)이다.1894년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이 선포되면서 백동화(白銅貨)가 발행(發行)되었다. 1900년 용산전환국이 설립되었으며 화폐(貨幣) 주조(鑄造) 시설 외에 제지고와 인쇄소가 설치되었으며 백동화(白銅貨)를 대량으로 주조(鑄造)·발행(發行)하였다. 한성은행(漢城銀行)은 1897(광무 1)년 2월 민간인에 대한 환전과 금융 업무를 목적으로 김종한(金宗漢)과 이보응(李普應)이 설립한 민족은행으로 1900년 영업이 부진하여 휴업하다가 1903(광무 7)년 2월 합자회사로 재설립하여 황실 및 정부 재산 관리로 영업을 전환하였으며 1906년 자본금을 30만 원으로 증자하였으며 주식회사로 바뀌었다. 한국은행(韓國銀行)은 1909년 7월 한국은행조례를 공포하고 설립한 중앙은행으로 일본 제일은행을 승계하였다.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은 개항 이후 일본의 금융자본이 밀려들자 경제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1899(광무 3)년 1월 30일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내탕금(內帑金)과 상인들의 자본으로 설립한 민족은행이다. 심상훈(沈相薰)·민병석(閔丙奭)·민영기(閔泳綺)·이용익(李容翊)·이근호(李根鎬) 등 31명의 발기인이 모여 민병석 농상공부 대신을 초대 은행장, 이근호를 부은행장으로 세우고 자본금 5만 6000원으로 설립했다. 투자자는 박경환(朴景煥)·김두승(金斗昇)·정영두(鄭永斗)·김기영(金基永)·송문섭(宋文燮) 등이었으며, 1899년 3월 인천·목포·부산에 지점을 설치하는 등 업무 확장에 나섰으나 자본금 불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부로부터 국고금을 빌린 이후 은행장에 영친왕(英親王), 부은행장에 이용익(李容翊)이 취임하면서 대한 황실, 고위 관료들이 이용하는 특수은행이었으나 1906년 실업인이 은행을 경영하면서 민간은행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