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蔡濟恭)은 1743년(영조 19년) 문과 정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수찬(修撰) ·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747년(영조 23년) 익릉별검을 거쳐, 1748년(영조 24년)에는 승문원에 들어갔다. 같은해 가주서로 한림회권에는 참가할 수 없었으나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이권(二圈)을 더하여 소시(召試)에 응하도록 하여 뽑히도록 하는 등 특은(特恩)을 입었으며 이것으로 쳥요직인 예문관검열이 될 수 있었다. 1753년(영조 29년) 호서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균역법의 시행을 조사하고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이후 홍문관수찬,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사헌부집의를 거쳤고 특히 세자(世子)의 학문정진에 대한 많은 건의를 하였다. 1755년(영조 31년)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으로 활약하였고, 그 공로로 승정원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열성지장(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영조 34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세자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목숨을 걸고 이를 극력 막아 철회시켰다. 이후 대사헌, 대사헌, 경기감사를 역임하였고, 1762년 윤 5월 사도세자가 폐위되고 사사되었다. 1764년(영조40년) 개성유수, 예문관제학, 비변사당상을 거쳐 안악군수를 지냈다. 1767년(영조 43년) 홍문관제학,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769년(영조 45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1770년(영조 46년) 병조판서가 되어 군마의 관리에 노력했고, 같은 해 예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국가재정 확충과 국제교역에 필요한 은과 삼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영조 47년(1771)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있으면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2년(영조 48년) 세손우빈객(世孫右賓客)이 되어 세손의 교육과 보호를 담당했다. 공시당상(貢市堂上), 지경연사, 홍문관제학이 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정조와의 관계가 깊어졌다.1774년(영조 50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병조판서와 영조의 깊은 신임으로 내의원제조를 지내며 영조의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와 좌참찬으로 활약했다. 1776년(정조 1년) 3월에 영조가 승하하자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작업에 참여하였고, 곧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 당시의 영의정 김상로 등 사도세자를 모해했던 세력의 옥사를 처결하였고, 그 공로로 보국숭록대부로 가자되었다. 이해 가을 홍계희 등이 호위군관과 공모하여 정조를 살해하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궁성을 지키는 수궁대장에 임명되었다. 정조특명으로 사노비(寺奴婢)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을 마련함으로써 정1품에 이르렀다. 정조 원년과 정조 2년에도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이후 규장각제학, 예문관제학, 한성판윤, 강화유수를 역임하였고, 1778년(정조 2년)에는 사은 겸 진주정사로 중국에 다녀왔는데 박제가, 이덕무를 동반했다.1779년(정조 3년) 홍국영과의 마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이듬해 홍국영이 실각하자 다시 예조판서에 등용되었으나, 1781년 소론계 서명선 정권이 집권하면서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의 과격한 주장,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하여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집중공격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명덕산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6년(정조 10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1788년(정조 12년) 국왕의 명으로 우의정이 되었고 이때 황극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1790년(정조 14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체제가 3년간 지속되며 정사를 좌우했다.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폐지, 신해통공책 등을 실시했다. 1790년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남인 계열인 동시에 신서파의 영수로서 공서파와 대립하여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했으며, 이듬해 육의전 외에 시전의 금난전권을 박탈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했으나 진산사건이 터지자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792년 좌의정으로 복직했다.1793년(정조 17년) 영의정이 되었다.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을 주장하여,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화성유수가 되어 정약용과 함께 화성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