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옥(李澄玉)은 1416년 무관친시에 장원급제하여 사복시소윤(司僕寺小尹)이 되었다. 1423년(세종 5) 경원진첨절제사로 김종서(金宗瑞)를 따라 아산(阿山)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하고 이듬해 절제사가 되었다. 이후 북방에서 여진족을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43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1434년 다시 영북진절제사로 함길도관찰사 김종서와 함께 경원진·영북진을 설치할 터를 확정하고 성벽을 설치했다. 1436년 회령절제사를 거쳐 판회령도호부사가 되어 오랑캐의 추장 후라운과 가은독이 회령을 침입하자 물리쳤다. 1449년 20여 년 간 북방 경비를 담당하며 4군 6진의 개척에 기여한 공로로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이징옥은 1450년 함길도절제사가 되었으나 1453년(단종 1) 황보인(皇甫仁)·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그를 김종서의 심복이라 하여 비밀리에 파직하고 박호문(朴好問)을 몰래 보내어 한성으로 불러 올렸다. 이징옥은 영문(營門)으로 가 파직되었음을 알고, 중앙의 정변에 분격하여 박호문을 죽인 뒤 반란을 일으켰다. 군대를 이끌고 종성으로 북상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자칭해 장차 수도를 오국성(五國城)으로 옮
안평대군(安平大君)은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1438년 왕자들과 함께 함경도에 설치된 6진(六鎭)으로 가서 변방의 경계 임무를 맡으면서 야인(野人)들을 토벌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황표정사(黃票政事:왕자들이 추천한 사람 가운데 왕이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문신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다. 1452년 단종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문신·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었다. 1452년 7월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외교적 위상을 높이고, 돌아온 뒤에는 황표정사(黃票政事)를 폐지했다. 이에 안평대군은 잃어버린 권력의 회복에 힘써, 이징옥(李澄玉)으로 하여금 함경도 경성에 있는 무기를 한성으로 옮기게 하여 무력을 기르는 한편 1453년 9월 황표정사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데 성공했으나 다음달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했으며 안평대군 자신도 더불어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후에 귀양지가 교동(喬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사사(賜死)
권람(權擥)은 1450년(문종 즉위) 향시(鄕試)와 회시(會試) 및 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이듬해 집현전교리로서 역대병요(歷代兵要)의 음주(音註) 편찬에 참여했는데, 이때 수양대군과 가까워졌다. 그뒤 일찍부터 깊이 사귀어왔던 한명회(韓明澮)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했으며, 그와 함께 양정(楊汀)·홍달손(洪達孫)·류수(柳洙) 등의 무인들을 포섭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세조의 즉위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이어 승정원의 여러 벼슬을 거쳐, 1455년(세조 1) 이조참판이 되고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올랐다. 세조의 즉위를 알리기 위한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이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판서·대제학·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등을 거쳤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456년과 1457년 김문기(金文起) 등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사람들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1458년 5월에는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수찬관(修撰官)으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했으며, 대제학·
최항(崔恒)은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1444년 집현전교리로서 오례의주(五禮儀注) 편찬 및 운회(韻會) 번역에 참여했다. 1445년에는 집현전응교로서 용비어천가·동국정운·훈민정음해례 등을 짓는 데 참여했다. 1447년 집현전직제학이 되었으며 서연관(書筵官)으로 세자를 보도(輔導)했다. 1450년(문종 1)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 사신을,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세종실록 편찬에 관여했다. 다음해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고, 집현전부제학에 올라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했다. 1452년(단종 1)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해 계유정난 때 정인지·신숙주(申叔舟)·권람(權擥) 등과 함께 수양대군의 집권을 도운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녹훈되고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이조참판으로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으며 1455년(세조 1)에는 대사헌이 되어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뒤 호조참판·공조판서·예문관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461년 양성지(梁誠之)의 잠서(
정인지(鄭麟趾)는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예빈시주부·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한 뒤 집현전응교로 등용되어 세종의 집현전 융성책에 맞추어 큰 활약을 했다. 1425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다음해 세종의 경연관을 지냈다. 1430년 우군동지총제, 다음해 대제학을 거쳐 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사·인수부윤·이조참판·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형조참판과 형조판서를 거쳐 144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3년 지중추원사, 1447년 이조판서·지춘추관사, 1450년 좌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문종에서 단종 대에는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세력에 밀려 정치적 입지가 많이 위축되었다. 1453년 판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에 협조하여 계유정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좌의정으로 발탁되었으며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한 후에는 영의정부사로 승진되고 좌익공신(左翼功臣)에 책봉되었다. 1458년 세조의 불서 간행에 반대하여 부여로 부처(付處)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5년 70세로 치사를 원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내
강희안(姜希顔)은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4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섬서주부(司贍署主簿)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돈녕부주부·이조정랑·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1443년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1445년 최항(崔恒) 등과 더불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주해했다. 또한 1444년 신숙주(申叔舟) 등과 같이 고금운회(古今韻會)를 번역했으며, 1447년에는 신숙주·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사헌부 장령·지사간원사 등을 두루 거치고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이해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팔도 및 한성의 지도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 1456년에는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그는 관계하지 않았다는 성삼문의 진술로 화를 면했다. 이어 1463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이육사(李陸史)는 1925년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그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간도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이육사는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新朝鮮社)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다. 베이징과 한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한성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했다.
조병옥(趙炳玉)은 미국 유학시절 한인회(韓人會)·흥사단(興士團)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했고, 1925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으나 좌익 교수 배척을 명분으로 사임했다. 이후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이사와 비밀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창립위원과 재정총무를 역임했고, 1929년 11.3 대한광복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에 취임했으며, 1937년 수양동지회(修襄同志會) 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하고, 출감 후 협력을 바라는 일제의 요구를 일체 거부하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는 등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일제의 압력과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향리인 용두리로 내려갔으며 1945년 8·15 대한 광복이 되자 김성수·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미군정 경무부장(警務部長)으로 재직하면서 치안 유지에 진력했다.
윤동주(尹東柱)는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하였고 그 해 3월 간도(間島) 용정(龍井)에 유해가 묻혔으며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희생되었다는 주장 등, 윤동주의 죽음은 일제 말의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이 수차례 제기되었다.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을사늑약,경술늑약에 의해 설치된 통감부,총독부,경성부는 왕궁,종묘,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왕릉,원묘,태실,별궁,행궁,관아,성문을 훼손하였으며 대한 황실 궁내부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는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되고 국외로 불법 반출되어 교육기관,기록기관과 외국이 소장중이며 미술공예품은 1909년 순종황제가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하였고 경운궁 황실박물관으로 이관 후 총독부 고적조사 수집품,도굴 문화재,구입 장물,사찰 기탁품과 함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어 문화기관이 임시 소장중이므로 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고 제실박물관 100주년을 기념하여야 한다. 문화재청은 국외로 불법 반출 후 환수,교육기관·문화기관이 임시 소장중인 실록·의궤·일기·등록·국새·칙령·어찰·지도·사진 등 황실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창경궁 제실박물관,경운궁 황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귀속하고 통치체제,대외관계,황실의례(태극기,애국가,KOREA,국새,독도·간도,도성·궁궐,환구제,사직제)를 전시 홍보하여야 하며 고궁박물관은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황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귀속한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