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李陸史)는 1925년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그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간도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이육사는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新朝鮮社)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다. 베이징과 한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한성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