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崔恒)은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1444년 집현전교리로서 오례의주(五禮儀注) 편찬 및 운회(韻會) 번역에 참여했다. 1445년에는 집현전응교로서 용비어천가·동국정운·훈민정음해례 등을 짓는 데 참여했다. 1447년 집현전직제학이 되었으며 서연관(書筵官)으로 세자를 보도(輔導)했다. 1450년(문종 1)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 사신을,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세종실록 편찬에 관여했다. 다음해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고, 집현전부제학에 올라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했다. 1452년(단종 1)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해 계유정난 때 정인지·신숙주(申叔舟)·권람(權擥) 등과 함께 수양대군의 집권을 도운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녹훈되고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이조참판으로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으며 1455년(세조 1)에는 대사헌이 되어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뒤 호조참판·공조판서·예문관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461년 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한글로 번역·간행했고, 조선의 법률·제도를 집대성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했다. 1463년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착수하고, 신숙주와 함께 어제유장설(御製諭將說)을 주해했다. 1466년 판병조사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우의정·좌의정·영의정에 잇달아 올랐다. 1469년(예종 1) 원상(院相)으로서 경국대전상정소 제조(提調)를 겸하여 경국대전을 완성한 데 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의 편찬을 시작했다. 1470년(성종 1) 부원군에 봉해졌고, 역대제왕후비명감(歷代帝王后妃明鑑)을 편찬했다. 다음해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제거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감춘추관사로서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