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옥(趙炳玉)은 미국 유학시절 한인회(韓人會)·흥사단(興士團)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했고, 1925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으나 좌익 교수 배척을 명분으로 사임했다. 이후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이사와 비밀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창립위원과 재정총무를 역임했고, 1929년 11.3 대한광복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에 취임했으며, 1937년 수양동지회(修襄同志會) 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하고, 출감 후 협력을 바라는 일제의 요구를 일체 거부하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는 등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일제의 압력과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향리인 용두리로 내려갔으며 1945년 8·15 대한 광복이 되자 김성수·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미군정 경무부장(警務部長)으로 재직하면서 치안 유지에 진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