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차기 유력주자인 박근혜 후보가 16일 신문방송인편집인협회가 주최한 토론회에 초청 패널로 초대받아 여러 분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평소에 밝혔던 내용도 있었고 새롭게 밝힌 내용도 있었다. 예상한 바와 같이 오늘 아침 전 언론의 헤드라인은 온통 5.16과 유신에 대한 박근혜의 답변 내용을 대서특필했고, 야당의 차기 대권 주자들과 새누리당의 비박 주자들도 박근혜의 답변에 대한 공세가 주를 이루었다. 박근혜는 5.16이 혁명이냐, 쿠테타냐에 대한 양자 택일성 질문을 받고서는 “5.16은 그 당시로 돌아가 볼 때 우리국민이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세계에서 끝에서 두 번째라 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로서 힘들게 살았고 그 당시 안보적으로 매우 위험한 위기 상황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게 아닌가 한다”라고 대답했다. 5.16은 1961년에 일어났다. 5.16이 혁명이냐 쿠데타냐를 따지기에 앞서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4.19 시민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야당이던 민주당이 권력을 장악하여 집권당이 되었다. 명목상 국가 원수인 대통령은 간선제로 뽑았으나 권력의 운용은 내각책임제 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권력체제가 내각책임제로 전환되자 권력을 선점하기 위해서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갈려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고 그로 인해 정치판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고, 정치판이 권력투쟁의 장으로 변질되자 사회적으로는 4.19 혁명의 분위기에 편승한 혁신계와 일부 민족주의적 학생 운동권을 중심으로 민족자주화 운동과 통일 촉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당시 반공국가였던 남한의 근본이 위협받을 정도로 사회 혼란상은 심각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91.63 달러에 불과했고 순위는 거의 꼴찌 수준인 89위에 불과 했다면 당시의 경제상과 국민들의 생활상은 일일이 두견새 우는 사연을 열거할 필요조차도 없이 지극히 상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야말로 보릿고개에다 초근목피는 상습화 되고 체질화 되었던, 극히 가난한 생활 바로 그 자체가 그 시대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5.16은 이런 시대적 배경과 사회상을 바탕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박근혜는 이런 시대상황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혁명(Revolution)이란 기존의 권력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여태까지 국가 권력을 장악했던 세력을 대신해서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체제와 사회 혁명을 수반하는 정치 변혁 활동을 말하지만, 쿠데타는 일부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수행하는 행위임에 따라 쿠데타는 지배계급 내부의 수평 권력 이동에 불과한 정치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혁명과 쿠데타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가 있다. 또한, 혁명은 피지배 계급이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하여 정권 교체를 이룬다는 당위성도 부여받고 있다.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 혁명, 미국의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 중국의 신해혁명은 역사적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는 분명한 공과(功過)가 존재한다. 그러나 국민들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정치를 잘 한 대통령으로 언제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으뜸으로 선택하고 있다. 국민들은 과보다는 공이 더 많다고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야당이나 반 박근혜의 세력들의 주장하는 바와는 동 떨어진 선택인 것이다. 5.16이 일어난 지 이제 불과 5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의 재단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단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른 감이 없지도 않다. 박근혜는 박 전 대통령의 자식이다. 자식이 아버지의 행위를 여타 야당정치인이나 여느 정치평론가처럼 함부로 평가 할 수도 없는 천륜지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5.16의 성격을 각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혁명이라고 부른들, 또는 쿠데타라고 부른들 5.16은 50년 전에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고 정변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박근혜는 유신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에게 분명히 사과를 했지만 5.16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결코 부인하지를 않았다. 이런 박근혜의 발언을 두고 지금 정치권에서는 앞 다투어 5.16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혁명과 쿠데타의 경계선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앞으로 10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지금과 같이 과연 갑론을박을 하고 있을지 후세 사가들의 평가에 맡겨두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분명히 발생했던 과거의 사실에 대해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역사적 평가를 다르게 정의하는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세월의 흐름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장자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