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朴次貞)은 1927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여성운동의 전국적인 통일기관인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자 근우회 동래지회 활동을 주도하고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과 출판부문에서 활동하는 등 전국적인 차원에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11.3 대한광복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한성 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0년 봄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는 둘째 오빠 박문호의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국내에서의 항일투쟁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 등 의열단(義烈團)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1년 의열단 의백 김원봉(金元鳳)과 혼인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였다. 난징(南京)으로 거주지를 옮겨 청년 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임철애 등 가명을 사용하며 여자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김원봉은 1935년 난징에서 좌우 독립운동단체 9개를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자 박차정은 부녀부 주임으로 활동하는 한편, 1936년 이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혁당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모든 여성들이 총단결하여 민족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창립되자 선전 · 홍보 분야를 맡아 활동하였으며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하며 의용대원의 사기 진작과 선전활동에 매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