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朴容萬)은 1904년 보안회(保安會)가 주도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의하여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옥중에서 이승만과 만나 동지가 되었다. 출옥 후 190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미국의 네브라스카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06년 헤이스팅스 대학,190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해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군사학을 부전공으로 택하고 ROTC 과정도 이수하였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09년에는 네브라스카주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내에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열어 30여 명의 학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1910년에는 헤이스팅스대학 구내로 이전하였다.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을 맡았으며 "국민개병설"(1911년)과 "군인수지"(1912년)를 집필했다. 미국 체류 중 네브라스카에서 옥중 동지 이승만을 재회하였다. 1913년 2월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했다.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大朝鮮 國民軍團)을 창설하여 미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고, 국민보 주필을 맡는다.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 동맹회(弱小國 同盟會)에 참석하였으며, 태평양 시사(太平洋時事)를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19년 길림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창립에 관여하였고 의군부의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3 .1 대한광복운동에 관련된 문서를 편집, 한국인의 봉기와 독립 선언서 등에 대한 진실이라는 책자를 발행하여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하와이 지부를 조직하였다.상해 임시정부에서 외무총장에 선출되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은 임정이 외교노선의 편향을 띄자 취임하지 않았다. 1919년 5월 17일 하와이를 출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한다. 1920년 4월 북경에 도착한 박용만은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는 신숙(申肅),신채호(申采浩), 이회영 등과 함께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를 결성한다. 1921년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이 드러나자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를 반대하며 군사통일회의에선 상해 임정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불승인안을 통보한다. 1921년 군사통일회의는 박용만, 신숙, 박건병을 국민대표회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 회원으로 선출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 연안 국제신문 기자대회에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듬해 군사운동의 근거지 확충을 목적으로 베이징에 대본공사(大本公社)를 설립하는 한편, 1927년에는 초등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여 교포의 국어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