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는 한국사 편찬 작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위원회를 중심으로 1925년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여 새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회장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 이완용·박영효·권중현·쿠로이타·핫도리·나이토, 위원에 이마니시·이능화·어윤적·오다 등, 간사에 이나바 등 3명, 수사관에 이나바·홍희(洪熹)·후지타 등 3명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 등이 수사관으로 참여했으며, 최남선(崔南善)도 1928년 12월 촉탁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한국사를 편찬하면서 고조선사,발해사,대한제국사를 고의로 누락하였으며 서술의 중심은 한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서술하지 않고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며 사대주의로 일관했다거나 중국과 일본보다 역사와 문화가 뒤떨어져 있다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강점의 합법성,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사료의 취사선택·왜곡을 자행했다.한국사편찬작업에 참여한 한국인 학자들은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한국사 폄하,왜곡에 기여했다.
최남선(崔南善)은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국비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이광수 등 유학생과 사귀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1906년 7월 유학생 회보인 대한흥학회보 편찬회를 맡아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편집 활동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1907년 5월, 귀국한 뒤 우리 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인쇄 시설을 구입하여 1908년 신문관을 창설하였다.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등 중요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새 시대의 주인공을 위하여 1908년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을 발행하였다.이 잡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였으며, 1910년 3월 안창호와 함께 청년 학우회를 설립하여 청년학우회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내면서 청년학우회의 노래를 짓는 등 청소년 지도 운동에 앞장섰다. 10월 민족 문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켜 광문회를 설립해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비롯한 20여 종의 고전이 간행되었다. 1912년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이, 새별 등의 잡지을 발간하였다.1914년 종합 계몽 잡지 청춘을 발간하여 새로운
신민회(新民會)는 1907년 4월 안창호(安昌浩)의 발기에 의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과 한성의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했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표방하였고, 사회각층인사를 망라하여 조직하였는데, 비밀단체임에도 그 활동은 거의 대부분 합법성을 띄고 이루어졌었다.신민회가 조직된 이후 경기, 황해, 평안, 함경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회원 수를 늘려갔다.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과 공화정체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며 민족 교육 계몽운동 및 무장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신민회는 민족 교육 추진하고자 평양에 대성학교와 정주의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민족 산업 육성을 위해 평양에 자기회사 설립과 대구에 태극 서관을 운영하였고, 민족문화 양성하고자 대한매일신보 발간작업과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여 고전문학을 간행하였다.간도에 독립기지를 건설하였는데, 남간도에 삼원보와 서간도에 한흥동,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1911년 일제는 총독 암살 기도를 했다는 안악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검거되었고 105인 사건 등 일제의 조작사건으로 탄압을 받아 해체되었다.
장응진(張膺震)은 1897년 한성 관립영어학교에 다니면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 참가하는 등 계몽운동에 뜻을 두었다.1905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태극학회의 평의원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태극학회는 주로 관서 지방 출신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단체로 장응진은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태극학회에 참가하면서 태극학회의 기관지 태극학보의 발행인을 맡고 초대 회장에 올랐으며, 서북 지역 기독교 계열 청년들의 정신적 지도자 안창호가 도쿄를 방문했을 때 만나 영향을 받았다. 1907년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의 교무책임자를 맡았다. 초대 교장은 윤치호였다. 1909년에는 윤치호와 최남선 등이 조직한 신민회 방계 조직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12년 일제가 신민회 탄압을 위해 서북 지역의 애국계몽 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한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1913년부터 1922년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학감으로 재직했다. 담당 과목은 이화학(理化學)이었다. 휘문고보에서 근무하면서 1920년에 창설된 조선교육회 결성 작업에도 참여했다.
태극학회(太極學會)는 1905년 일본 도쿄에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 출신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다. 초기에는 새로 유학 오는 후배를 돕기 위한 강습소로 시작되었다가, 1905년 9월 15일에 정식으로 창립되었다.초기에는 유학생 친목 단체 또는 학술단체로서 출발하였으나, 차츰 한국에 지회를 설치하면서 애국계몽 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보였다. 태극학회와 갈이 관서 지방을 기반으로 삼고 있던 서우학회 측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관서 지방에서 영향력이 큰 안창호도 도쿄에 들러 태극학회 간부들을 만났다.1909년에 기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대한학회와 함께 대한흥학회를 출범시키면서 해체되었다. 초기에는 평의원을 선출하여 운영하다가, 1906년에 초대 회장으로 장응진을 선출했다. 1907년부터는 대한제국 국내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지회는 평안북도 성천군과 의주군 등 여섯 군데에 있었다. 회원 수는 지회 회원을 합쳐서 600여 명이었고, 1908년 6월 말을 기준으로 일본 유학생의 약 40퍼센트는 태극학회 회원이었다.태극학회는 기관지 태극학보를 발간하고, 산하에 교육 기관인 태극학교를 운영했다. 태극학보는 일본에서 발행된다는 제한 때문에 정치적인 내용은 담고 있지
박상준(朴相駿)은 평안남도 성천의 사립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태극학회의 성천지회 회장을 맡아 계몽운동을 벌였다. 이후 강동군과 순천군의 군수가 되었고 경술늑약이 불법 늑결된 이후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었다.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평안남도 참여관(1921), 강원도 지사(1926), 함경북도 지사(1927), 황해도 지사(1928)를 거쳐서 1939년에는 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1937년 시국강연반에서 전국을 나누어 담당하여 시국 강연을 벌일 때 경상남도에서 친일 연설을 했으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9), 국민총력조선연맹(1940),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1941),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2)에 참가했다.1939년 경학원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1941년 유림 주도로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주관했고, 1943년 친일 유림 단체인 유도인연합회 회장에 올랐다.
조희연(趙羲淵)은 1874년 무과에 급제한 뒤 무관으로 근무했다. 1894년 갑오농민운동 때, 정토군(征討軍)을 조직해서 초토사 홍계훈, 양호순변사 이원회 등에게 군량 및 군비 등을 지급하여 파송하였다. 집권세력인 명성황후 세력이 청나라 군대를 청해서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하자 조희연은 이를 반대했고, 청군의 개입을 빌미로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실각시키고 흥선헌의대원왕을 추대할 때 여기에 가담했다. 친일 정권이 설 때마다 계속 등용되었다. 갑오개혁 때는 장위사(壯衛使)에, 김홍집의 친일 내각에서는 군무대신 서리, 군무대신, 군부대신에 각각 임명되었다.아관파천으로 일본에서 10여 년간의 망명 생활을 한 끝에 1907년 귀국하여 궁내부 특진관과 훈포장을 담당하는 표훈원 총재를 지냈다. 1910년 8월 경술늑약 불법 늑결 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의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이용직(李容稙)은 1875년 별시문과에 급제, 정언·응교·승지·이조참판·협판교섭통상사무·대사헌·개성유수 등을 거쳤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청군의 개입을 빌미로 일본군이 한성으로 들어오자 외무협판으로 영등포에서 그들의 입경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 11월 내무협판이 되었다. 1902년 윤용선(尹容善)을 탄핵했다가 철도(鐵島)에 유배되었고, 풀려난 뒤 황해도·전라북도 관찰사를 거쳐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 이후 일본의 강요로 고조 광무제가 강제 퇴위하게 되었을 때 퇴위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퇴위에 찬성했다. 1909년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학부대신이 되었다. 1909년 일진회가 합병론을 제기해 전국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나자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1910년 6월 경찰권 위임에 관한 각서 체결에 반대했다. 8월 18일 각의에서 경술늑약안이 논의되자 망국안(亡國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고 반대하자, 이완용이 일본 수해방문을 위한 특파대신으로 차출하여 즉시 출발하도록 조치해 8월 22일 최후 어전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한일 강제합병 뒤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子爵)
1904년 6월에 일본인 나가모리가 어공원(御供院) 소관의 산림·천택과 황무지 개간권을 이양받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게 되자, 이에 대한 한국민의 반대 여론이 강해지고 있었다. 7월 13일 송수만(宋秀萬)·심상진(沈相震) 등이 한성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일제의 황무지 개간요구를 저지할 목적으로 보안회(保安會)를 발기했다. 회장은 신기선(申箕善), 부회장은 정유인(鄭裕寅)이 추대되었다. 보안회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것이므로 조그마한 땅도 양여할 수 없다는 내용의 통문을 전국에 돌리고, 이 목표 달성을 위해 성토·연설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보안회 집회와 일제와의 무력 충돌 후, 대한제국 정부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요구를 거절하겠다고 발표했다. 보안회는 해산되지 않고 황성용(黃性溶)을 새로 회장으로 선출했다. 9월 협동회(協同會)로 명칭이 바뀌면서 활동이 위축되어 갔다. 보안회는 독립협회의 성격을 계승했던 최초의 계몽운동단체로서 일제의 황무지 개간요구를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오기호(吳基鎬)는 1905년 초 국권수호를 열강에 호소하기 위하여 나인영(羅寅永)·이기(李沂) 등과 함께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참석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6월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모치즈키 등 정계 요인들을 차례로 만나서 동양 평화를 위한 한국·중국·일본 3국의 단결과 한국 독립의 보장 등을 역설했다.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되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것이라는 보도를 접하고, 나인영과 연명으로 이토와 일왕에게 각각 장문의 글을 보내 경고했다.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급히 전보를 보내 을사늑약 늑결을 막으려 했다. 12월 나인영과 함께 권중현(權重顯)·박제순·이근택(李根澤)·이완용(李完用)·이지용(李址鎔)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로 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박대하(朴大夏)·서창보(徐彰輔)·이홍래(李鴻來) 등의 장정들과 함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동지들이 검거되자 나인영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진 출두해서 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지도(智島)로 귀양갔다. 나인영과 함께 민족 정기를 보존하기 위해 대종교(大倧敎)를 창도(唱導)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