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6월에 일본인 나가모리가 어공원(御供院) 소관의 산림·천택과 황무지 개간권을 이양받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게 되자, 이에 대한 한국민의 반대 여론이 강해지고 있었다. 7월 13일 송수만(宋秀萬)·심상진(沈相震) 등이 한성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일제의 황무지 개간요구를 저지할 목적으로 보안회(保安會)를 발기했다. 회장은 신기선(申箕善), 부회장은 정유인(鄭裕寅)이 추대되었다. 보안회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것이므로 조그마한 땅도 양여할 수 없다는 내용의 통문을 전국에 돌리고, 이 목표 달성을 위해 성토·연설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보안회 집회와 일제와의 무력 충돌 후, 대한제국 정부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요구를 거절하겠다고 발표했다. 보안회는 해산되지 않고 황성용(黃性溶)을 새로 회장으로 선출했다. 9월 협동회(協同會)로 명칭이 바뀌면서 활동이 위축되어 갔다. 보안회는 독립협회의 성격을 계승했던 최초의 계몽운동단체로서 일제의 황무지 개간요구를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