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응진(張膺震)은 1897년 한성 관립영어학교에 다니면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 참가하는 등 계몽운동에 뜻을 두었다.1905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태극학회의 평의원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태극학회는 주로 관서 지방 출신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단체로 장응진은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태극학회에 참가하면서 태극학회의 기관지 태극학보의 발행인을 맡고 초대 회장에 올랐으며, 서북 지역 기독교 계열 청년들의 정신적 지도자 안창호가 도쿄를 방문했을 때 만나 영향을 받았다. 1907년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의 교무책임자를 맡았다. 초대 교장은 윤치호였다. 1909년에는 윤치호와 최남선 등이 조직한 신민회 방계 조직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12년 일제가 신민회 탄압을 위해 서북 지역의 애국계몽 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한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1913년부터 1922년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학감으로 재직했다. 담당 과목은 이화학(理化學)이었다. 휘문고보에서 근무하면서 1920년에 창설된 조선교육회 결성 작업에도 참여했다. |